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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각 지역 자료

(2017.4.23) 장쑤성 난징(남경) 해상실크로드, 난징대학살


2017년 4월 23일, 


해양 분야 전문가이신 주강현 교수님과

최재선 KMI 연구위원님을 모시고 출장 지원을 다녀왔다. 


정화 대원정의 시발점인 장쑤성 난징 江苏省南京에

두 분을 모시고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관련 일정을 간단히 사진과 함께 설명, 

그리고 당시 페북에 남겼던 글을 블로그에 기록해둔다. 



1. 장쑤성 난징(남경)에 위치한 해상 실크로드 주인공 정화(郑和)의 묘


정화묘(郑和墓)

 

정화는 중국 명대(1371~1433) 운남성 곤양주 사람으로 회족이다. 원래 성은 마() 씨이며, 후에 주어진 성이 정()이다. 정화는 명대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한 항해가이다. 14057월부터 1433년까지 직접 영락제의 명을 받고 200여 척의 선박함대를 이끌었다. 당시 관병은 27천 여 명이 동행했으며, 선박을 수리할 목수들도 함께 동행했다. 정화는 7차례에 걸쳐 함대를 이끌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40여 개의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중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정화와 관련된 관광지는 해상실크로드를 타고 다양한 지역에 분포해 있으나 정화의 묘는 남경이 유일하다. 남경의 남부 우수산(牛首山)에 위치한 정화의 묘는 현재 강소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있던 곳은 파괴되었으며, 1984년과 2005년 양 차례에 거쳐 복원되었다정화의 묘는 원래 정화묘에 있던 석재를 묘위에 얹어 복원된 모습으로 현재 보존되어 있다




2. 정화의 조선소


龙江船广遗址 정화 조선소 유적지

 

20038월부터 20047월까지, 남경시 박불관은 룽장(용강)에 위치한 명나라 보선광(宝船厂; 조선소) 유적지 "육자당(六作塘)"의 발굴을 진행했다. 이는 중국의 고학계 첫 선박 조선소 관련 유적지 발굴 사업이었다. 1년 가까운 시기에 약 2가가운 면적이 발굴되었는데 다량의 진귀한 문물 자료가 출토되었다. 600년에 가까운 역사기록이 처음으로 발굴된 것이다. 이 용강조선소유적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남경시 박물관에서 개최한 宝船·西洋·郑和에도 소개된 바 있다. 2003년 여름, 당시 유적지 발굴팀은 3개의 길이 400~500m, 넓이 40~50m의 선형 수로를 발견했는데 장강을 향해 일자형으로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600년 전 정화의 선박이 조선되었던 주요 지역이었다.





3. 난징 중산부두(중화민국 시절 중요 내하항만), 장강(양쯔강)




4. 부자묘夫子庙 : 해상 실크로드 당시 장강으로 이어지는 피더항 역할 담당.




5. 남경대학살 추모관



남경대학살 방문 직후 페북글.


南京大屠杀 남경대학살 추모 기념관에 다녀와서.


내부의 다수 여러 사진들이 있지만 차마 올릴 수 없다. 너무 잔인한 모습들을 현실적으로 묘사했고, 또한 희생자들의 실제 유골도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 부터 1938년 1월까지 6주에 걸쳐 남경에서 발생했다. 당시 일본 군은 28 차례에 걸쳐 대량 학살을 자행했는데 당시 돌아가신 분들이 19만 명이고, 산발적으로 살해당한 사례가 858 건이며, 이후 다시 사망자가 15만 명에 달한다.(남경대학살 추모 기념관 자료) 그래서 중국은 30만명의 사망자라고 정리해 말하고 있다.


남경대학살뿐만 아니라 동북지역에서는 731부대에 의해 생체실험 당했던 역사는 어떠한가. 지난 번 하얼빈에서 731부대가 자행했던 끔찍한 역사의 단편을 731부대 전범죄 전열관에 방문해 살펴봤다. 속에서 번져나오는 분노와 슬픔은 잊을 수 없다. 남경대학살 추모 기념관에서도 보는 내내 슬픔이 깊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남경대학살 추모 기념관은 실제로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장소 위에 추모 기념관이 건설되었다. 1만 여명의 유골이 묻힌 지역이 실제로 전시된 곳도 있다. 사진을 찍었는데.. 이곳에 올리지는 않겠다. 나는 아직 세례를 받지 못 했고 기도문도 제대로 외우지 못 하지만 그 분들을 위해 성호를 긋고 평안을 기원한다 짧게 기도했다.

지금 보이는 사진은 추모 기념관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영령을 모시는 곳으로 아래 꺼지지 않는 불을 올리고 국화 형상으로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저곳을 지나가는데 한 사내가 내 옆을 지나 초등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저기 보이는 불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그 사내의 아내는 뭐하는거냐고 물으며 만류했는데 그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아들을 데리고 저곳 바로 앞까지 갔다. 그리고 그 아들과 함께 저 영령을 향해 묵념을 하고 돌아왔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도 제2차 동학농민운동 때 수십만의 백성들이 도륙을 당했고, 독립군을 지원했거나 혹은 그들이 활동했던 지역의 주민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 당했다.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은 고문과 함께 희생당하거나 생체실험 당한 분들도 많다.


지난 정권에서 국정 교과서는 일본의 침략과 독재를 미화했고, 외교부는 일본과의 협의 과정도 공개하지 않고 "위안부"협정을 발표했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께는 과거는 잊으라는 식으로 돈 봉투를 흔들었다.


내 눈 앞에 자신의 아들을 끌고 저 영령을 추모하는 공간에 함께 묵념하던 저 사내의 모습 앞에 나는 무력했다.

일본을 적국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 역시도 우리에게 소중한 협력 파트너이다. 민간 교류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동북아 평화 구축을 위해 역사를 더더욱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당했던 수모를 바로 알고 역사를 제대로 분석해야 우리가 올바로 동북아 내 구성원으로서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지키지 못했던 우리의 무능함, 그리고 그런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부조리함을 철저히 분석하여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활하고 우리의 인식 속에 정착해야 만이 국가구조를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동북아의 평화가 중요한 시점에 많은 생각에 잠겼다.